항목 ID | GC015D02010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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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光緖銘刻石文 |
지역 |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태하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호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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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하리 465번지 내에 위치한 자연암반면에 새겨진 각석문
태하리 465번지 내에 위치한 크기 4.2×5.0m 가량의 자연암반석에 새겨진 각석문으로 문화재자료 제4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각석문은 1893년 당시 울릉도 수토관(搜討官)을 지낸 바 있는 조종성(趙鍾成)과 전 수토관 이규원(李奎遠), 영의정 심순택(沈舜澤)[1824~1906] 등이 울릉도에 이주한 주민들의 기아와 질병을 보살핀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각석문의 원문은 ‘光緖十九年 己巳 五月 日/聖火東漸 我候由來 誠功祝 華惠沈求/行平海郡守兼鬱陵島檢使 越松趙公鍾成 永世不忘碑/參判前檢察使行開拓使李公奎遠/領議政沈公舜澤恤賑永世不忘臺/主事行越松萬戶兼島長檢察官 徐敬秀/光緖十六年 庚寅四月 日 前五衛將 孫周螢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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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암반면에 새겨진 광서명 각석문 내용
현재 울릉도에 남아 있는 각석문은 광서명(光緖銘) 각석문을 위시하여 임오명(壬午銘) 각석문, 신묘명(辛卯銘) 각석문이 있는데, 이는 모두 수토관 또는 검찰사(檢察使)가 다녀간 기록이다. 광서명 각석문은 1417년(태종 17) 이후 조선 정부의 기본정책이었던 수토정책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기록으로서, 적극적인 이주정책의 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광서명 각석문은 다른 두 각석문과 달리 수토관이 직접 각석한 것이라기보다 이주과정에서 기근(饑饉) 등으로 인해 비참한 상황에 빠졌던 울릉도의 주민들이 중앙정부에서 보살핀 데에 감사하는 마음을 보이는 뜻에서 만들었다는 특징을 가진다. 영의정 심순택이 울릉 주민들을 위하여 어떤 대책을 내었는지 정확한 사료가 전해지지 않지만, 각석문이 만들어진 이듬해(1894) 고종에게 영남지역 백성들을 보살핀 결과를 보고하는 것으로 보아 심순택의 주도하여 울릉도를 비롯한 영남 각 지역에 진휼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1890년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서경수와 손주형의 기록은 이 각석문에서만 남아있을 뿐 다른 기록을 찾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