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5008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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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根實家族入島 |
영어의미역 | Bark Geunsil Family Moving into Ulleungdo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울릉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기봉 |
성격 | 천주교 박해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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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연도/일시 | 조선 말기 |
관련인물/단체 | 박근실[박베드로] |
[정의]
조선 말기 천주교 박해를 피해 천주교도인 박근실 가족이 울릉도에 들어온 일.
[개설]
천주교 박해 말기 박해를 피해 울릉도로 입도한 첫 천주교가족으로 의의가 있지만, 사고로 부부가 죽은 뒤 어린 자녀들만 남아 천주교는 전파하지 못하였다.
[역사적 배경 및 발단]
17세기 초 중국으로부터 전파된 천주교는 1783년(정조 8) 이승훈(李承薰)의 복음활동으로 호서 지방과 호남 지방까지 전파되었다. 그러나 1801년(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를 시작으로 천주교는 100여 년 동안 10여 회의 크고 작은 박해를 받았다. 이후 1866년(고종 6) 병인박해(丙寅迫害)로 천주교 박해는 끝이 났지만, 이 시기 가장 많은 피해를 초래하였다.
울릉도에서 천주교에 대한 기록은 공도정책이 실시된 개척령 이전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개척령이 시작되고 천주교 박해가 극심한 후반기에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입도한 사실에 대한 기록이 전해진다. 그 가운데 첫 번째 기록이 박근실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다.
[목적]
천주교 박해의 후반기 박해를 피해 울릉도로 이주한 후 신앙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경과]
울릉도 개척령이 공포되고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극심한 후반기에 박해를 피해 박근실[세레명은 베드로] 가족은 울릉도에 입도하였다. 정확한 입도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다만 울릉도 개척령이 공포된 이후 천주교 박해가 극심한 후반기 그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입도하였다는 사실로 보아 1880년대로 판단된다. 입도 후 정착한 곳 또한 정확하게 전해 내려오는 바는 없다. 다만 이후 산 아래 통구미로 내려왔다는 기록에서 판단하건데, 나리분지에서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실 가족은 독실한 신앙심으로 매일 가족들이 모여 시간이 나는 대로 기도를 올렸으며, 하늘의 계시를 받아 승천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전 재산을 인근 주민들에게 나눠주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많은 시간이 지나도 그러한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자 실망하고, 통구미 입구 암석 밑으로 어린 자녀[2남 1녀]를 데리고 내려와서 거주하였지만 박근실을 포함한 부부는 화재로 목숨을 잃고, 어린 자녀는 주민 고○○의 집에서 양육되었다고 전해진다.
부부가 일찍 목숨을 잃음에 따라 어린 자녀를 포함한 다른 이들에게 천주교를 전파할 기회가 없었으며, 천주교는 이후 1955년도 서정길 대주교가 오기까지 전파되지 못하였다.
[결과 및 의의]
조선 말기 울릉도 개척령과 함께 첫 천주교 신자가 천주교 박해를 피해 울릉도에 입도하지만 그들을 인도해줄 목자가 없어 울릉도에 천주교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다. 이후 1955년이 되어서 비로소 울릉도에는 천주교 역사가 시작되었지만, 박근실 가족의 입도는 울릉도에 천주교 신자가 처음 입도한 사건으로, 비록 그들이 자리를 잡지 못했지만 개척령 이후 천주교 박해를 피해 이곳에서 자리를 잡고 독실한 신앙 활동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