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5006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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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洪鳳漢 |
영어음역 | Hong Bonghan |
이칭/별칭 | 익여,익익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울릉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상규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익여(翼汝), 호는 익익재(翼翼齋). 이조판서 홍만용(洪萬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중기(洪重箕)이다. 아버지는 홍현보(洪鉉輔)이며 어머니는 임방의 딸이다.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장인이다.
[활동사항]
1735년(영조 11) 생원이 되고, 음보(蔭補)로 참봉에 등용되어 세자익위사세마로 있을 때인 1743년 딸이 세자빈[惠慶宮洪氏]으로 뽑혔다. 이듬해 세마로서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사관(史官)이 되었다. 다음 해 어영대장에 오르고 이어 예조참판으로 연접도감제조(延接都監提調)를 지낸 뒤 1752년 동지경연사가 되었다.
비변사당상이 되어 청인(淸人)들이 애양책문(靉陽柵門) 밖에서 거주하며 개간하는 것을 금지시켰으며 『임진절목(臨津節目)』을 편찬하였다. 1755년 구관당상(句管堂上)·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이어 좌참찬에 승진하였으며, 1759년 세손사(世孫師)가 되었다. 1761년 세자의 평양원유사건(平壤遠遊事件)으로 인책당한 이천보(李天輔)·민백상(閔百祥) 등이 자살하자 우의정에 발탁되었다. 그 해에 좌의정을 거쳐 판돈녕부사를 지낸 뒤 영의정에 올랐다. 한때 세자 문제로 파직되기도 했으나 곧 좌의정으로 복직되었다. 1763년에는 주청사(奏請使)로 청나라에 다녀오는 등 영조의 정책에 순응해 많은 업적을 이룩하였다. 특히, 당쟁의 폐해를 시정하고 인재를 발탁할 것 등의 시무6조(時務六條)를 건의해 시행하게 하였다.
또한 백골징포와 환곡작폐의 엄금, 은결(隱結)의 재조사 등을 단행해 국고를 채우고 백성의 부담을 경감하도록 하였다. 1768년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그리고 울릉도의 사적을 널리 조사한 내용을 책으로 엮음으로써 울릉도에 대한 영토의식을 높였다. 1769년(영조 45) 울릉도에서 인삼을 캐는 잠상의 일에 연루된 죄인을 당시 영의정이었던 홍봉한이 임금을 대신하여 체차(遞差)[관리의 임기가 차거나 부적당할 때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일을 이르던 말]할 사람으로 서명선을 추천하였다.
1771년 영중추부사로 있던 중 반대 세력에 의해 사도세자의 아들 은신군 진, 은언군 인의 관작이 삭탈되고 나아가 세손(世孫)[뒤의 정조]까지 그 권위가 위협당하자 이를 막다가 삭직되고 청주에 부처되었다. 그러나 홍국영(洪國榮)의 기민한 수습으로 풀려나온 뒤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